맞춰만 줬다면! "이제 나와 살려면 당신이 맞춰야 한다."
맞춰만 줬다면! "이제 나와 살려면 당신이 맞춰야 한다."
사나운 개를 보며 인간을 보다
___강형욱 훈련사의 훈련에서 발견한 관계 진실 __
최근 강형욱 훈련사의 늑대견 훈련 영상을 보며,
단순히 개 훈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공동체,
그리고 상담사이지만, 여전히 맞추고 있는 불편한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영상 속 개는 가족을 물고 위협하며 자신보다 약하다고 느끼는 대상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인간 세상에서도 너무 자주 보아온 모습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사랑보다 먼저 드러난다
동생이 개에게 물리는 장면을 본 김성주가 보호자에게 물었다.
"내 가족이 개한테 물리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걷어차는 시늉이라도 하며 막으려 할 것 같은데,
왜 제지하지 못했나요?"
보호자는 짧게 대답했다.
"무서웠어요. 저도 물릴까 봐요."
그 순간 마음에 남은 것은 개의 공격성이 아니라 보호자의 두려움이었다.
사람은 두려움에 압도되면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지키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랑보다 두려움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상처받을까 봐.
거절당할까 봐.
관계가 깨질까 봐.
그래서 필요한 경계를 세우지 못한다.
잘 길들여진 자칼같아요.
강형욱 훈련사는 개를 보며 말했다.
"잘 길들여진 자칼 같아요."
자칼은 기능적으로 훌륭할 수 있지만,
무감각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사냥에만 관심있는 특징이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오직 잘 되는 것, 옳고 그름, 바름에만 관심있지
지금 어떤 감정과 욕구가 존재할지 생각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재혼 후 집도 없이 떠돌던 우리 형제에게 안부 한 번, 도움 한 번 주지 않았던 새어머니도 떠올랐다.
일주일 전
그녀의 딸이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개가 반려견이 되었다고 야생성을 잃는 것이 아니듯, 인간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살아도 내면은 여전히 자칼일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외로움
훈련사는 보호자에게 말했다.
"약한 대상을 이용하는 겁니다. 당신이 반려견에게 특별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냥 쉬운 대상일 뿐입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관계 속에서 늘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때로는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상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버려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먼저 다가간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이미 균형이 무너져 있다.
받기만 하는 사람에게 계속 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결핍과 외로움을 그 상대를 통해 채우려는 시도일 수 있다.
그래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를 우선해서 먼저 다가가는 행동을 멈추고, 자신의 외로움을 먼저 돌보는 일이다.
강한 사람 앞에서만 달라지는 사람들
훈련사 앞에서 개는 달라졌다.
평소에는 가족을 물고 공격하던 개가 강형욱 훈련사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상대를 보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들은 약한 사람에게만 공격적이다.
만만한 사람에게만 화를 내고,
만만한 사람에게만 비난하고,
만만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불안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강한 사람 앞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조심한다.
우리는 여기서 힘의 차이를 이용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상대를 존중해서 행동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평가한 뒤 행동을 선택한다.
훈련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한 사람 앞에서만 예의 바른 것은 인격이 아니라 안전을 위한 계산일 뿐이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훈련사가 말했다.
"제가 왜 14~15살 때 사나운 개가 무섭지? 그게 컴플렉스였어요.
그래서 30년 동안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훈련했어요."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두려움이 없어졌을까요?
아니요."
이 대목이 가장 인상 깊었다.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는다. 대신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처도, 불안도, 분노도 마찬가지다. 없애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다루는 것이 목표다.
훈련사는 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갈등을 끝내지 않는 사람
개는 극도로 저항했다.
으르렁거리고, 달려들고, 반항했다.
그러나 훈련사는 웃으며 말했다.
"조금 힘들었지? 조금 쉬었다가 한 판 더 할까?"
이 장면은 건강한 관계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건강한 사람은 갈등을 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도망가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상대를 부수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대가 나에게 맞춰 살아가도록 분명한 경계를 세울 뿐이다.
함께 살려면 누가 누구에게 맞출 것인가
"네가 익숙해지는 방법은 없어. 내가 으르렁거려도 이 게임은 끝나지 않아."
그리고 훈련사는 개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너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이 집에서 살려면 네가 우리에게 맞춰야 한다."
맞춰주는 것이 진정 사랑인가?
상대의 기분에 맞추고,
상대의 분노에 맞추고,
상대의 요구에 맞추고,
상대의 불안에 맞추다 보면,
관계는 공존이 아니라 종속이 된다.
맞춰주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평생을
부모에게 맞추고,
배우자에게 맞추고,
공동체에 맞추고,
세상에 맞추며 살아온 사람들.
그들에게 필요한 말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와 함께 살고 싶다면 너도 맞춰야 한다."
이것은 공격이 아니다. 지배도 아니다. 건강한 경계선이다.
위선은 사랑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많은 관계가 사랑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인 척하는 두려움 때문에 무너진다.
배려인 척하는 자기포기.
용서인 척하는 회피.
사랑인 척하는 집착.
겸손인 척하는 무기력.
신앙인 척하는 복종.
우리는 그것을 오랫동안 사랑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일 수 있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서로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경계를 세우는 것.
강형욱 훈련사의 늑대견 훈련을 보며 다시 생각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을 직면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우고, 상대를 통제하지도 않으며, 상대에게 통제당하지도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진짜 사랑의 시작인지도 모른다.